세월 호 구조 안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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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적인 나라라면 생떼 같은 학생들과 승객 300여명이 참변을 당했으면 사고원인을 따지고 불법을 수사하고 보상과 배상을 하고 하는 대책을 순차적으로 서둘러 마련하는 것이 정상이다. 하지만 무리한 선박 증개축으로 평형수까지 줄여서 화물을 과적을 하고 거기다 승객들을 태워서 운행을 한 민간해운업자의 책임은 뒷전이었다. 이렇게 행정은 행정대로 차분히 대응을 해나가는 와중에 참사를 대하는 시민의식도 돋보였다. 온라인상에서는 온갖 악플과 조롱, 가짜뉴스가 돌지만 현실에서는 성숙한 시민의식을 접할 수 있다. 참사현장에 마련된 애도공간에서 윤석열과 이상민을 욕하거나 문재인 탓을 하는 것이 더 이상 용납이 안 된다.
- 때마침 사고 현장으로 출동할 헬기 512호도 3009함에 있었다.
- 또 여당 야당 다 지지율 떨어진다고 하는데, 진보정당은 거의 무력해진 상황이에요.
- 김 경위는 이어 검찰이 재차 “선내 진입을 지시해야 한다는 생각을 못한 것이냐 아니면, 승조원들의 선내 진입이 불가능할 것 같아 지시를 안 한 것이냐”고 묻자 “진입 지시를 내려야 한다는 생각을 못했다”고 또 진술을 번복했다.
- 우리나라 공공의료부문 중에서 제일 취약한 부분이 ‘저녁이나 주말에 응급실 갈 정도는 아닌 경증환자가 물어볼 곳도, 갈 곳도 없다’는 거에요.
- 이어 “수사가 중앙지검, 군검찰까지 여러 곳에서 나눠 진행되고 있다”면서 “한 곳에서 관련 사안을 모두 조사하고 처리할 검찰 내 조직을 마련해달라”고 촉구했다.
당시 가장 적정한 조치에 대해 6명의 전문의는 ‘신속한 이송’이라 자문했지만 A학생이 병원에 도착한 시각은 최초 발견시각으로부터 4시간 41분이 소요된 밤 10시5분경이었다. 그러나 영상자료 확인 결과, 헬기들 다수는 팽목항에 대기 중이었고, 참사 현장에서 수색활동 중인 헬기는 확인되지 않았다. 그러나 검찰 측이 “부정장은 검찰 조사에서 선내 진입 지시 방송을 한 적이 없다고 진술했다”, “단정을 향해 올라가라고 큰 소리를 친 사람이 누구냐”고 따져 묻자 “기억이 안 난다”고 말꼬리를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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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가족들은 촉박한 공소시효를 감안해 신속한 재수사와 특별수사단 구성을 요구하고 있다. 장훈 4.16 세월호 가족협의회 운영위원장은 “가장 중요한 문제가 공소시효”라며 “현행법으로 처벌을 하려면 시효 만료를 앞둔 직권남용부터 적극적으로 수사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어 “수사가 중앙지검, 군검찰까지 여러 곳에서 나눠 진행되고 있다”면서 “한 곳에서 관련 사안을 모두 조사하고 처리할 검찰 내 조직을 마련해달라”고 촉구했다. 덧붙이는 글
물론 해경과 승무원들이 초기 대응만 잘했어도 승객 전원의 구조도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무책임한 선장과 선원들, 그리고 초기 대응에 시간을 허비한 해경은 합작해 화를 키웠다. 객실에 그대로 있으라는 안내방송 대로 승객들이 가만 있는 무책임한 선장을 먼저 도망을 쳤고 해경과 정부는 허둥대다 골든타임을 놓쳤다. 이 초기대응 실패가 곧바로 국민들의분노를 일으켰고 참사의 정치화는 이렇게 시작된 것이다. 김 경위는 또 개인적인 추측을 사실인양 진술하다가 재판장의 경고를 받기도 했다.
세월호 참사는 생명의 존엄성을 되새기고 국가의 존재 이유를 물었다. 일터에서는 오늘도 ‘김용균’이 죽어가고 있고, 하루가 멀다하고 전국에서 ‘정인이 사건’이 일어나고 있다. 진상 규명이 미흡하고 책임자 처벌이 지연되면서 세월호는 정치의 먹잇감이 되고, 유가족들은 2차 가해에 무방비로 노출돼 있다.
세월호 구조 안한 이유 도대체 뭘까요?
오전 8시49분 사고가 발생해 30도 정도 기울어진 때부터 해경이 도착한 9시34분까지 40여 분간 배는 약 20도밖에 더 기울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해경이 도착한 뒤 40여 분간은 급격히 기울어져서 10시17분 결국 뒤집어졌다. 해경 지휘부는 구조 세력이 사고 현장에 도착하기 전에 구조 계획을 세웠어야 했다.
현재까지 구조 실패 책임을 지고 형사 처벌을 받은 공무원은 당시 현장에 출동했던 해경123정 김경일 정장(업무상과실치사)뿐이다. 이를 두고 유가족 측은 구조 활동 지휘계통에 있었던 해경 관련자뿐 아니라 박근혜 전 대통령 등 청와대 인사의 책임에 대한 진상규명도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6년이면 기억이 흐려질 만도 하지만, 우리 눈앞에서 304명이 수장된 2014년 4월 16일의 ‘세월호 참사’는 어제 일처럼 또렷하게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세월호 추모 노래 중 화인(火印)은 불에 달군 인두로 몸에 새긴 자국이라는 뜻이다. 세월호는 생생하게 재현되는 사건으로 우리의 마음속에 각인되고 지워질 수 없는 충격적인 사건 그 자체였다. 그런데 ‘세월호 참사‘라는 표현은 그 사건을 제대로 표현하고 있을까?
오세아노스호와 세월호…우리는 왜 못 구했나
그래서 이런 경우 유럽에서 많이 하는 ‘경증질환에 대한 공공의료기관 및 전화삼담이 필요하다’는 제안을 했어요. 워낙 큰 일이라서 많은 사람들이 거의 처음에는 제정신이 아니었을 거에요. 인터넷이나 페이스북 들여다보고 그러다 울고… 이런 것들의 반복이었던 것같아요. 사참위는 “오후 6시35분경 ‘익수자 P정으로 가라’는 함내 방송이 나올 당시 의사의 사망판정이 없었다. 오히려 5시35분경 원격의료시스템을 통해 의사로부터 병원 이송조치를 지시받은 상태여서 단정이송이 아닌 헬기이송이 필요한 상황이었다”며, 특히나 “사체검안서상 공식 사망시간은 밤10시10분”이라고 밝혔다.
세월호 참사 겪은 시민들이 참사의 정치화에 강한 거부반응을 보이는 탓이다. 2014년 10월 5일 검찰은 최종적으로 “세월호의 침몰원인이 무리한 구조변경과 과적에 따른 복원성 악화 및 조타수의 미숙한 운행”이라고 발표했다. 그리고 구조문제에 대해서는 현장 구조책임자만의 과실로 결론 냈다.
세월호 침몰 사고 관련 수사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87년 어정쩡한 타협으로 6공화국이 생겨났고, 그 이후 5번째 대통령인데, 2008년은 6월항쟁 이후 최대의 운동이었어요. 미완의 운동이 어떻게 끝날 것이냐는 박근혜 정부 때에 판가름이 날지 아니면 아직도 이른 것인지도 모르죠. FTA를 처음에 어떻게 알았냐면, 글리벡 반대운동을 하다가 변혜진 선생(보건의료단체연합 기획실장) 소개로 브라질에서 열리는 세계사회포럼에 참가하게 됐는데, 거기서는 FTAA(남미 FTA)를 반대하는 운동이 한창이었어요. 배들이 너무 낡았는데, 낡은 배가 사고율이 높은 것은 당연한 거 아닌가요? 그런데도 정부는 4월 23일과 5월 2일에 은근슬쩍 의료신기술 평가를 간소화시키고, 4차 투자활성화대책에 들어있는 규제완화 조치 중의 하나를 처리해 버렸어요. 사참위에 따르면, 희생자 중 세 번째로 발견된 단원고 A학생은 참사 당일 오후 5시24분에 발견됐다.
해경을 기다리다가 빠져나올 수 없게 된 수백 명의 승객을 걱정하는 게 아니었다. 세월호와 300m 떨어져 있는 둘라에이스호 문예식 선장이 세월호 사진 “몇 컷”을 찍어 선사에 보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 이야기를 들은 해경 상황실은 문 선장에게 전화했다. 세월호가 뒤집어져 물속으로 가라앉은 10시21분이었다. 그 이유는 ① 사고 현장에 마땅한 착륙 장소가 없고 ② 헬기는 소음 때문에 통신 지휘가 어려우며 ③ 각종 통신 장비를 갖춘 3009함에서 지휘하는 게 낫다고 판단해서라고 해명했다.
서해해경청 상황담당관 유연식은 9시23분에야 진도VTS가 세월호와 교신하는 것을 처음 알게 됐다고 주장했다. 경비안전과장 김정식은 9시35분에야 진도VTS 전화를 받았다고 했다. 두 사람은 서해해경청장 김수현에게는 진도VTS-세월호 교신을 아예 보고하지도 않았다고 입을 맞췄다. 김수현도 감사원에서 “상황실이 다소 시끄러워 통화 내용을 들을 수 없었다”고 진술했다. 오전 8시58분 사고를 인지한 해경 상황실은 곧바로 세월호의 상태, 현재 승객의 상황 등에 관한 정보를 파악했어야 옳았다.
승객 퇴선을 유도하기 위한 준비 작업에 돌입해야 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건 의료민영화만의 문제가 아니에요. 전체 사회문제로 받아들이지 않는 한 절대 이길 수 없어요. 보건의료운동만으로는 힘들고, 흔히 하는 말로 광범위한 연대가 필요한 것이고, 그 속에서 보건의료운동은 자기 역할을 더 키워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