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양 수십 년 만에 캠프 험프리스 사령관 부인 한국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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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파라다이스 클럽 기주(문지기)하던 사람이 지금도 여기 사는데, 날 보면 놀려. 에이(A)급 색시였던 그 김 마담이 늙은이가 다 됐다고….” 1951년 21살에 결혼한 김 할머니는 애가 들어서지 않았다고 한다. “대를 끊을 거면 제 발로 나가달라”는 시어머니의 성화에 1년 만에 집에서 쫓겨나, 부산 미군부대 안 클럽의 웨이트리스로 취직하면서 ‘기지촌 생활’을 시작했다. 안정리에서 포주들의 규제는 더 거셌다. 1971년 7월 흑인들이 클럽 내 흑인차별을 문제 삼아 클럽을 돌아다니며 한국인을 때리고 기물을 부순 사건이 일어났다. 주민 80여 명이 부상당한 ‘안정리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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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보증인을 구하지 못해 시민권 얻기를 포기했고, 불법으로 계속 미국에 있을 수 없으니까 한국으로 왔어. 젖먹이 아들딸은 지들 할머니한테 두고 왔어. 돌아가봤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양색시’ 일인데 애들을 잘 키울 수 없을 것 같았어.” 전 할머니는 한국으로 와서, 그전에 생활하던 이곳 안정리로 다시 와 웨이트리스 일을 했다. 돌아온 그날부터 아이들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애들 생각에 참을 수가 없어서 밤에 잠이 안 왔어. ” 마약 판매를 하다 적발된 전 할머니는 감방 생활을 하기도 했다.
애를 포대기에 싸서 친정 엄마한테 갔어. 근데 그때 나를 경멸하던 엄마의 눈빛을 잊을 수가 없어”라고 했다. “내 엄마부터 그렇게 우리를 업수이보는데 세상은 오죽하겠어?
미 성조지에 사연 소개…생후 6개월 미국 가정에 입양돼
그레이브스 사령관은 성조지에 “가족들이 결국엔 서로 다시 만나게 된 데 대해 매우 기뻐했다”며 “아내에게 굉장히 특별한 순간이었던 것 같다”고 전했다. 16일 미군 기관지인 성조지에 따르면 세스 그레이브스 캠프 험프리스 사령관의 부인인 타라 그레이브스(46) 씨는 1975년 미국으로 입양됐던 한인이다. 미군과 결혼해도 미국 생활이 쉽지만은 않았다. 미군과 결혼하고 같이 미국에 가서 아이 둘을 낳았던 전명옥 할머니는 결국 애 둘을 두고 돌아왔다. “남편이 술을 하도 먹어서 별거하게 됐고, 이후 시민권을 얻어야 하는데 보증을 서주겠다던 시집 식구들이 다 거절했어.
- 에이(A)급 색시였던 그 김 마담이 늙은이가 다 됐다고….” 1951년 21살에 결혼한 김 할머니는 애가 들어서지 않았다고 한다.
- 이 만남을 계기로 그는 자신의 친부모가 당시 딸 대신 아들 하나를 더 원했고, 어려운 형편 등으로 입양을 결정했던 사실을 전해 들었다.
- 힘을 줘도 잘 열리지 않고 삐그덕거리기만 했다.
- “할머니”를 부르자 안쪽 또 다른 미닫이문이 천천히 열렸다.
- 어제의 할머니들의 이야기는 그래서 오늘도 현재진행형이다.
- 그러나 어떤 이유로 들어왔건 끝은 비슷했다.
어디선가 잘살고 있을 거야.” 정은님(69) 할머니는 아이가 다 큰 중학교 때에야 입양 보냈다. 아이들이 화장실 갈 때마다 놀리니까 애가 화장실을 못 가고 책상에만 앉아 있었던 거야. 학교 화장실을 못 가서 바지에 오줌을 쌌나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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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브스 사령관은 성조지에 “가족들이 결국엔 서로 다시 만나게 된 데 대해 매우 기뻐했다”며 “아내에게 굉장히 특별한 순간이었던 것 같다”고 전했다. 새로 올 미군에게 집터를 내줘야 할지도 모르는 할머니들은, 젊은 시절에는 그 미군들에게 더 나은 ‘서비스’를 제공하도록 관리되고 규제됐다. 대표적인 것이 1971년 시작된 성병검진이다. 경기도 평택시 안정리 10여 개의 클럽이 불을 밝힌 큰길에서 5분쯤 걸어갔다.
파란색 페인트가 드문드문 벗겨진 미닫이 나무 대문을 밀었다. 힘을 줘도 잘 열리지 않고 삐그덕거리기만 했다. 간신히 문을 열고 들어서자 앞이 캄캄했다. 벽을 더듬어 스위치를 찾았지만 불은 켜지지 않았다. “할머니”를 부르자 안쪽 또 다른 미닫이문이 천천히 열렸다. 결국 입양된 이후 한 번도 한국을 다시 찾지 않았던 타라 씨의 가족 재회는 남편이 작년 한국으로 근무지를 옮기면서 ‘우연히’ 성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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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어떤 이유로 들어왔건 끝은 비슷했다. 이들의 진짜 이름은 “가난하고 힘없는 여성”이었다. 국가는, 공동체는 이들에게 어떤 의미일까.
집에 왔는데 그 추운 겨울에, 글쎄, 바지가 꽁꽁 얼어가지고는…. (입양) 보내야지.” 주변에서도 다 입양을 권유했다. 아이를 낳으면 펄벅재단이나 대한사회복지회 같은 곳에서 찾아와 “한국에서 혼혈아를 잘 키우기란 힘들다”라며 입양을 권유하기도 했다. 윤복희가 미니스커트 입기도 전에 내가 먼저 미니스커트 입고 부츠 신고 평택극장을 돌아다녔어.
편지 교환도 2년 만에 중단했다고 한다. 지금 할머니들의 자리는 필리핀 여성들이 채우고 있다. 어제의 할머니들의 이야기는 그래서 오늘도 현재진행형이다. 할머니들을 피해자로만 바라보는 것은 기지촌 여성을 부르는 단어 앞에 ‘양’자를 붙이며 그들을 주변화한 것과 다르지 않다. 어떤 할머니들은 자발적으로 이 일을 선택했고, 또 어떤 할머니들은 휩쓸려가기도 했다. 빠져나갈 기회가 있었음에도 익숙함에 기대어 그대로 남은 할머니들도 있다.
당시 흑인들의 난동은 ‘영내’의 흑백 갈등을 ‘영외’로 끌고 나온 측면이 컸다. ‘만만한’ 클럽과 한국인들을 상대로 분풀이를 한 셈이다. 실제 당시 클럽들 중에는 흑인 미군이 가는 곳과 백인 미군이 가는 곳이 구분됐고, 피부색에 따라 출입이 통제되기도 했다. 어떤 피부색의 미군을 상대하느냐에 따라 여성들 사이에서도 ‘계급’이 갈렸다. 타라 씨는 16살 때 양어머니의 도움으로 친모와 한때 연락이 닿아 통역본 편지를 주고받기도 했다. 하지만 당시 친모는 직접 대면하기 전까지는 자세한 얘기를 하기를 꺼렸고, 한국어를 배우라는 말도 했다.
입양된 이후 한 번도 한국을 다시 찾지 않았던 타라 씨의 가족 재회는 남편이 작년 한국으로 근무지를 옮기면서 ‘우연히’ 성사됐다. 타라 씨는 “아직까지 완전히 치유되지 않은 저의 (입양으로 인한) 상처가 치유될까 싶어서, 가족들에게 다시 연락해 보기로 했다”고 말했다. 윤씨는 지금 신부전증, 천식, 고지혈증 등으로 아무 일도 할 수 없다. 몸무게가 2년 전보다 15kg이 불어 있다.